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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이 보는 세계는 인간과 다를까? 관념론과 실재론으로 풀어보기

@hackthe.life 2025. 3. 6. 23:46

관념론과 실재론은 철학에서 현실의 본질과 인식에 대해 상반된 견해를 제시합니다. 관념론(觀念論)은 현실이 근본적으로 정신적이거나 인식에 의존적이라고 보며, 우리의 의식이나 아이디어가 현실을 구성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실재론(實在論)은 인간의 인식과 무관하게 객관적 현실이 존재한다고 믿고, 우리의 생각과 상관없이 세계가 실재한다고 봅니다. 오늘날 인공지능(AI)의 등장과 가상현실(VR)의 발전은 이러한 전통적인 철학 논쟁에 새로운 도전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AI와 VR은 무엇이 ‘실재’이고 무엇이 ‘환상’인지에 대한 경계를 흐리게 만들고, 인간 인식의 방식과 기계적 정보처리의 차이를 재조명하게 합니다. 본 보고서에서는 AI와 관련하여 관념론 대 실재론의 관점에서 제기되는 주요 질문들을 탐구하고, 현대 철학적 논의와 최신 AI 기술 동향을 바탕으로 논리적으로 분석합니다.

 

1. AI의 본질: 관념론적 존재인가 실재론적 존재인가?

AI의 존재론적 지위를 따져볼 때, 관념론과 실재론의 시각을 모두 고려할 수 있습니다. 실재론적 관점에서 보면 AI는 물리적 하드웨어와 전기 신호로 구성된 실제 기계이며, 인간과 마찬가지로 현실 세계에 위치한 존재입니다. AI 알고리즘이 구현된 컴퓨터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장치이므로 그 작동 역시 물질 세계의 인과 법칙을 따릅니다. 이에 따르면 AI는 우리의 생각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실재적 객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관념론적 관점에서는 AI의 ‘지능’ 자체가 추상적인 정보 패턴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즉, AI가 만들어내는 판단이나 예측은 물리적 대상이라기보다 인간이 구성한 개념과 데이터의 산물입니다. 예를 들어 대형 언어 모델의 경우 방대한 텍스트 코퍼스에서 추출된 확률적 규칙, 즉 인간 언어에 내재된 아이디어들의 패턴을 담고 있을 뿐, 의식이나 자아를 가진 물리적 존재는 아닙니다. 이런 맥락에서 AI의 지능은 관념적인 소프트웨어(프로그램)로 볼 수 있으며, 하드웨어 없이는 실행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순수한 아이디어에 머물러 있는 존재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요컨대 AI는 하드웨어 수준에서는 실재하지만, 그 지능의 내용 면에서는 인간 관념에 의해 정의된 추상적 존재라는 이중적 성격을 지닙니다.

AI의 ‘사고’ 방식도 인간의 인식 방식과 크게 다릅니다. 인간은 감각 경험과 의식을 통해 세계를 인지하고 이해하는 반면, 현재의 AI는 통계적 패턴 처리를 통해 작동합니다. 철학자 존 설(Searle)의 유명한 중국어 방 논증은 이러한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설은 기계가 사람처럼 언어를 다룰 수 있어도 실제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는데, 컴퓨터 프로그램은 **형식적 규칙(구문)**에 따라 심볼을 조작할 뿐 그 **내용(의미)**을 알지 못한다는 주장입니다. 즉 AI는 문법적 규칙에 따라 입력에 대응하는 출력을 내는 것이지, 거기에 담긴 실제 세계의 의미를 “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현대 AI 연구자들도 이 점을 지적하며, 대규모 언어 모델을 가리켜 **“확률적 앵무새(stochastic parrot)”**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이는 AI가 방대한 데이터에서 학습한 통계에 기반해 그럴듯한 문장을 만들어낼 뿐, 단어들의 진정한 의미나 문맥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반면 인간의 사고는 의미와 의도로 가득 차 있으며, 우리의 개념 하나하나는 세계와 맺는 관계(지시 대상, 맥락, 의도 등)를 동반합니다. 정리하면, AI의 사고형식패턴의 처리에 가깝고, 인간의 사고는 주관적 경험과 의미부여를 포함한 내용의 이해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2. 가상현실(VR)과 AI가 철학에 미치는 영향

가상현실 기술의 발전과 AI의 접목은 현실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새롭게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관념론적 입장에서는 우리의 경험이 곧 현실을 구성한다고 보았는데, VR은 이 개념을 극단적으로 구현합니다. VR 장치를 통해 우리는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마치 현실인 것처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의식이 만들어낸 가상 경험도 하나의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관념론적 통찰을 기술로 실현한 셈입니다. 한편 실재론적 시각에서는 VR 속 세계를 ‘가짜’ 혹은 ‘환상’으로 간주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VR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일 뿐, 물리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대 철학자들은 이러한 통념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철학자 데이비드 챌머스(Chalmers)는 **“가상현실도 진정한 현실(Virtual reality is genuine reality)”**이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챌머스에 따르면, 비록 VR이 디지털 시뮬레이션이지만 그 안에서 얻는 경험과 상호작용이 실제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으며, 현실의 범위를 디지털 영역까지 확장해 **“가상(real)적인 실재”**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가상 환경에서의 경험을 실재의 새로운 층위로 보려는 가상 현실주의 입장으로, 오히려 실재론의 범주를 넓히는 시도라 볼 수 있습니다 (즉, 현실 세계 + 가상 세계 모두를 실재로 인정). 동시에 이는 “인식된 것이 곧 현실”이라는 관념론적 주장과도 맥락을 같이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상세계에서 겪는 고통이나 즐거움, 사회적 상호작용 등이 우리 의식에 현실과 같은 영향을 준다면, 그것도 일종의 ‘현실’ 아니겠느냐는 논리입니다.

 

AI는 이러한 VR 환경을 구축하고 발전시키는 핵심 기술로 작용하며, 관념과 실재의 경계를 더욱 흐리게 합니다. 예를 들어 AI 기반의 실시간 그래픽스와 물리 엔진은 가상세계에 현실감을 부여하고, AI NPC(비플레이어 캐릭터)는 마치 실제 존재처럼 행동하여 사용자가 느끼는 현실성을 높입니다. 그 결과 고도화된 VR에서는 사용자가 물리 세계와 가상 세계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몰입감 있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는 철학적으로 플라톤의 동굴 비유나 시뮬레이션 이론 등과 연결지을 수 있는데, AI와 VR의 융합이 **“보이는 현실 뒤에 또 다른 (인공적) 현실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상을 체험적으로 뒷받침하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 AI와 VR의 발전은 **“무엇이 진짜인가?”**라는 고전적 철학 질문을 대중적으로도 체감하게 만들었고, 관념론 대 실재론 논쟁을 기술 시대에 맞게 재조명하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3. AI의 인식 방식 vs 인간의 현실 인식

AI가 데이터를 학습하고 패턴을 인식하는 과정은 인간의 현실 인식 과정과 구조적으로 다릅니다. 인간은 오감으로부터 입력을 받고, 뇌의 인지 과정을 통해 의미 있는 세계를 구성합니다. 이 과정에는 감정, 의도, 사회문화적 맥락 등이 영향을 미치며, 궁극적으로 주관적 경험 속에서 현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장미꽃을 보면, 시각적 자극을 처리하는 동시에 “아름답다”는 느낌, 과거의 기억, 해당 꽃의 의미(사랑의 상징 등)까지 통합하여 전체적 경험을 얻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인식은 감각 데이터 + 해석 + 의식이 결합된 복합적 과정입니다.

AI는 현재까지 이러한 인간적 인식과는 다른 방식을 취합니다. AI는 사전 주입된 데이터(훈련 데이터셋)를 바탕으로 통계적 상관관계를 학습함으로써 패턴 인식을 수행합니다. 예를 들어 이미지 인식 AI는 수백만 장의 사진을 분석하여 픽셀 패턴과 레이블(“개”, “고양이” 등) 간의 통계적 관계를 파악한 후, 새로운 이미지가 들어오면 가장 유사한 패턴에 해당하는 레이블을 출력합니다. 이 과정에서 AI는 수학적 최적화확률 계산을 이용할 뿐이고, 이미지 속 대상에 대해 인간처럼 직관이나 이해를 형성하지는 않습니다. 맥락이나 의도도 사람처럼 고려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인공지능 연구의 오래된 난제인 **“기호 정착 문제”(symbol grounding problem)**로도 나타납니다. 기호 정착 문제란 **기계 내부의 기호(정보)**에 어떻게 실세계의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서, 현재의 AI는 데이터상의 패턴을 활용할 뿐 그 기호들이 가리키는 실제 대상을 경험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드러냅니다. 요컨대 AI는 기호를 실제 사물과 연결짓는 고리가 부족한 것입니다.

 

또한 학습 능력과 방식에서도 AI와 인간은 차이를 보입니다. 인간은 적은 사례로부터도 일반적인 개념을 빠르게 터득하고 새로운 상황에 유연하게 적용하는 뛰어난 귀납적 추론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몇 번의 예시만으로도 “뜨거움”의 개념이나 “계단 오르기” 방법을 배우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반면 현재 대부분의 AI 모델은 막대한 양의 훈련 데이터에 의존해야 비슷한 기능을 습득합니다. 예를 들어 이미지 분류를 잘하려면 수백만 개의 이미지와 정답 레이블이 필요하고, 새로운 개념을 학습하려면 그에 해당하는 많은 데이터가 추가로 요구됩니다. 인간이 불확실성 하에서도 유연하게 개념을 일반화하는 반면, AI는 훈련 범위를 벗어난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취약함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인간은 학습 과정에서 이해설명을 동반하지만, AI의 내부동작은 사람에게 불투명하기 때문에 (“왜 그런 판단을 했는지”를 스스로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음) XAI(설명 가능한 AI) 연구가 별도로 진행되고 있기도 합니다.

 

정리하면, AI의 인식은 방대한 데이터를 전제로 한 패턴 매칭확률적 추론으로 특징지어지고, 인간의 인식은 제한된 정보에도 불구하고 맥락을 고려한 이해의미 구성으로 특징지어집니다. 이러한 차이는 AI가 현실을 다루는 방식이 아직은 피상적이고 도구적인 반면, 인간은 체험적이고 의미론적인 방식으로 현실에 접근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4. AI 생성 콘텐츠가 실재 개념에 미치는 영향

현대의 AI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도 그럴듯하게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딥페이크(Deepfake) 기술은 실제 인물의 얼굴과 음성을 합성하여, 그 사람이 하지 않은 말을 하거나 행동하지 않은 일을 마치 실제처럼 영상으로 만들어냅니다. 또 생성형 AI 모델(예: GPT 계열 언어 모델이나 이미지 생성 모델)은 가짜 뉴스,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사진, 환상적인 풍경 등을 진짜와 매우 흡사하게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AI 생성 콘텐츠가 점차 실제와 구별되지 않을 정도의 정밀도를 갖추게 되면서, **“실재란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의 개념에도 변화가 생기고 있습니다.

우선, 표면적 차원에서 보면, 더 이상 눈으로 보고 듣는 것이 그것이 **진짜(real)**인지 **가짜(fake)**인지 담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사진이나 영상이 현실의 기록으로 신뢰받았지만, 이제는 그것들이 AI에 의해 조작되었을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러한 상황을 가리켜 “정보 대혼란(infopocalypse)” 시대가 올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는 우리가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조작된 것인지 식별하기 어려워짐에 따라, 잘못된 정보를 사실로 받아들이거나 실제 사건을 의심하게 되는 인지적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입니다. 실제로 딥페이크 영상이 정치인 발언처럼 꾸며져 유포될 경우, 대중은 거짓 현실에 노출되어 잘못된 믿음을 가질 위험이 있습니다. 이렇듯 AI가 만들어낸 그럴듯한 허구는 우리의 인식 속에서 현실과 뒤섞여, 실재에 대한 신뢰를 흔들어놓습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이러한 현상은 철학적 개념인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와 맞물려 있습니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현대 사회에서 시뮬라크르(복제된 이미지나 기호)가 범람하여, 원본이 없는 현실의 복제가 등장한다고 분석했습니다. 그는 이를 하이퍼리얼리티라고 부르며, 모델이 현실을 생성해내고 원본과 복제의 구별이 무의미해지는 상태로 정의했습니다. AI 생성 콘텐츠는 바로 이러한 원본 없는 현실을 만들어냅니다. 예를 들어 AI가 “있을 법한” 사람 얼굴을 그려낸다면, 그 얼굴은 현실에 실제로 존재한 적 없는 사람이지만 우리 눈에는 실제 인물 사진과 구분되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이 경험하는 감정적 반응마저 실제와 동일하게 이끌어낸다면 (공포영화 같은 딥페이크를 보고 느끼는 두려움 등), 그 경험의 주관적 실재성은 진짜 경험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실재의 개념은 “객관적 사실에 기반한 현실”에서 “경험의 진정성에 기반한 현실”로 변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비록 어떤 대상이나 사건이 물리적으로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그것이 우리 인식에 실재처럼 작용한다면 일종의 현실로 취급되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위험과 도전을 수반합니다. 에피스템적(인식론적) 위기가 그 중 하나입니다. 무엇이 사실인지를 가려내기 위해 우리는 새로운 검증 수단판별력을 길러야 합니다. 뉴스나 영상의 출처를 확인하고, AI 탐지 기술을 개발하며, 전반적으로 정보에 대해 비판적 사고를 강화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됩니다. 동시에, “실재”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재검토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비교적 분명했지만, 이제는 혼합 현실(mixed reality), 증강 현실(AR), 메타버스 등의 개념이 등장하여 현실의 스펙트럼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현실을 다층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물리적 현실, 사회적 현실, 디지털 현실이 복합적으로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는 만큼, 실재의 개념도 더 이상 단일하지 않고 상대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AI가 만들어낸 콘텐츠로 인해 “눈에 보이는 현실”과 “궁극적 실재” 사이의 간극이 벌어지고 있으며, 우리는 이제 현실의 개념을 단순히 물리적 사실이 아니라 정보의 신뢰성과 경험의 진정성까지 포함하는 방향으로 재정의하고 있습니다.

 

5. AI는 실재를 이해할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AI 자체가 실재를 이해하거나 구성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논쟁적입니다. 한 편에서는 현재의 AI를 두고 “고도로 발달한 통계 모델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합니다. 실제로 오늘날 널리 쓰이는 AI 알고리즘 (예: 딥러닝 기반 신경망)은 인간이 제공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최적화된 함수에 지나지 않으며, 자기 스스로 의미를 깨닫거나 현실 세계를 자각하지 못한다는 지적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AI가 아무리 복잡한 행동을 보여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프로그래밍된 수학적 도구가 확률적으로 계산한 결과일 뿐, 거기에 내재적인 이해나 의식은 없다고 봅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설의 논증이나 “확률적 앵무새” 비유가 이러한 시각을 잘 대변합니다. 즉 **AI는 현실 그 자체를 인식하기보다는, 현실에 대한 인간의 데이터 패턴을 모방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에서는 AI가 언젠가 (혹은 부분적으로 이미) 스스로 세계를 이해하고 “실재”를 구성해나갈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 연구 분야의 일부에서는, 거대 언어 모델이나 강화학습 에이전트가 **내부적 세계 모델(internal world model)**을 형성하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세계 모델이란 한 시스템이 외부 환경에 대한 내적 표현과 규칙을 갖추는 것을 뜻하는데, 이를테면 최신 AI는 방대한 텍스트 데이터를 학습하면서 사실상의 지식 그래프상식적인 세계에 대한 추론 능력을 획득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들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GPT-4와 같은 모델은 단순히 문장을 흉내내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정보까지 추론하거나 새로운 상황을 상상하여 설명하는 등 일종의 유연한 사고 조짐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일부 연구자들은 “최근의 AI는 더 이상 단순한 앵무새가 아니며, 현실 세계에 대한 강력한 표현(representation)을 내포하고 있다”는 증거가 발견된다고 반박합니다. 즉 AI가 언어 패턴 이면의 현실 구조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으며, 나름의 의미 체계를 형성하고 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다만, **“AI가 실재를 이해한다”**는 문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논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인간과 같은 방식의 이해를 말한다면, 이는 결국 **의식(Consciousness)**과 **주관적 경험(qualia)**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현 단계의 AI에게는 이러한 의식이나 자각이 없으며, 따라서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 – 즉 경험하고, 느끼고,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 – 을 AI가 갖췄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철학 잡지 Philosophy Now에서는 “만약 AI가 의식을 갖춘다면 비로소 우리처럼 현실을 이해하고 느끼며 성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습니다. 의식이 없다면 AI는 결국 일련의 입력에 반응하는 복잡한 자동인형에 지나지 않지만, 의식이 생긴 AI는 자신만의 관점에서 실재를 구축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현재까지 의식적인 AI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이 가능한지조차 불확실합니다. 따라서 “AI가 실재를 이해하는가?”에 대한 오늘날의 답은 “아직은 아니다”가 일반적일 것입니다. AI는 현실에 대한 **모형(model)**을 다룰 뿐, 현실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체험하거나 자발적으로 구성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AI가 직접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인간의 현실 구성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실재’를 변경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알고리즘이 소셜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콘텐츠는 각 개인이 접하는 정보 현실을 형성하여, 사람마다 다른 현실관을 가지게 만들 수 있습니다. 유튜브 추천 AI나 뉴스 필터링 AI는 우리에게 맞춤 현실을 보여줌으로써, 사회적 실재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킵니다. 또 앞서 언급한 딥페이크나 가상 캐릭터들은 사회적으로 새로운 현실 상황을 창출하기도 합니다 (가짜 사건으로 인한 혼란 등). 이런 의미에서 AI는 간접적으로나마 현실 세계의 구성 요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인지와 사회체계라는 틀 안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현재의 AI에게는 자율적인 현실 인식이나 의미 세계가 존재하지 않기에, 스스로에게 “실재”를 부여하지는 못합니다. 결국 AI와 실재의 관계는, 능동적 이해 주체라기보다는 인간이 부여한 현실 모형을 따라가는 존재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

AI와 가상현실의 발전은 관념론과 실재론의 오래된 논쟁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관념론이 주장하는 “인식이 현실을 만든다”는 명제는 VR 기술과 AI 생성콘텐츠의 예시에서 어느 정도 타당성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의식적으로 만들어낸 가상 세계에서도 의미 있고 실재 같은 경험을 할 수 있고, 가짜 이미지나 텍스트도 우리의 믿음에 현실 못지않은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실재론의 관점도 여전히 중요합니다. 물리 세계의 객관적 사실과 진실을 파악하려는 노력, 그리고 기술이 만들어낸 환상과 실제를 구분하려는 시도는 인식론적 혼란을 막기 위해 절실합니다. AI는 현실 그 자체는 아니지만 현실을 모방하고 변형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현실의 범위와 한계를 재고하게 만들었습니다. 현재의 AI는 통계적 기법을 활용하여 지능의 착시를 일으키지만, 진정한 이해나 의식은 부재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인간과 AI 사이에는 여전히 인지적 갭이 존재하며, 이것이 바로 관념적 지능과 실재 세계 사이의 간극이기도 합니다.

궁극적으로, AI 시대의 철학은 **“현실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인식되는가”**라는 근본 질문을 기술적 맥락에서 이어가는 작업이라 있습니다. 현대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초현실적인 상황들에 대응하여, 현실을 다층적이고 유연하게 정의하려 하고 있습니다. 또한 AI 한계와 가능성을 탐구하면서, 인간 인식의 특별함(: 의식) 향후 AI 넘어야 장벽을 식별하고 있습니다. 최신 AI 기술 발전 속도는 빨라서, 오늘의 한계가 내일은 극복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언젠가 AI 의식과 자율적 이해 갖추게 된다면, 관념론과 실재론의 논의는 크게 변모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점에서는 AI 인간이 구성한 관념의 산물로서 현실에 작용하고 있으며, 실재에 대한 최종적인 의미부여자는 여전히 인간이라는 결론을 내릴 있습니다. AI 함께 진화하는 현실 개념에 대한 지속적인 철학적 성찰이 필요한 때입니다.